농어촌정보 포털 서비스, 농어촌알리미

농업지식

간척역사

> > >

왼쪽으로이동 개요 역사 우리나라간척지 우리나라 간척사업 해외 간척사업 오른쪽으로이동

01. 국토방위와 식량확보를 위해 최초로 시행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는 천연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된 탱자나무가 있다. 갑곶리 탱자나무는 높이가 약 4미터 밑둘레가 1미터에 이른다. 탱자나무치고는 아주 큰 나무이다. 수령은 4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남쪽지방에서 자라는 탱자나무가 왜 이곳 강화도에 심어졌을까? 그 이유는 국토방위를 위해서이다. 몽고군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를 빽빽이 심었던 것이다.

강화도는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 때 고종(高宗)이, 그리고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인조(仁祖)가 피신했던 곳으로 몽고군과 왜구의 침범을 막기 위해 도성을 쌓고 그 밑에 탱자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수 백년이 지난 후 도성은 그 흔적만 남기고 있으나 탱자나무는 지금까지 자라 국토방위의 살아있는 유물로 존재하고 있다. 강화도. 한국의 섬들 가운데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1232년부터 1270년까지 39년간 한반도(고려)의 수도였다. 외적의 침입에 따른 아픈 역사적 상흔과 더불어 강화도 곳곳에는 궁궐을 비롯한 각종의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있다.


02. 최초의 간척사업은 몽고군 저지용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우리 조상들의 처절하면서도 힘겨운 투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해로(海路)를 이용, 침범해오는 몽고군을 저지하기 위해 우리 선조들은 맨손으로 바닷길을 막는 연안제방을 구축하기까지 했다. 이 것이 문헌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의 최초의 간척사업에 해당된다. 이처럼 최초의 간척사업은 몽고군이라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국토방위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때가 고려 고종 22년, 서기 1235년이다. 이후 식량생산을 위한 농지조성목적의 간척사업은 고려고종 35년인 서기 1248년에 몽고병란시 부족한 식량을 조달할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당시 안북부, 지금의 청천강 하구인 평안남도 안주(安州)의 갈대섬(葦島)에 제방을 축조하여 농지를 조성한 후 백성들에게 경작하게 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그 후 고종 43년인 1256년부터는 군량미 등 식량확보를 위해 강화도에 제포, 와포, 초포, 이포 등의 간척제방을 축조하여 둔전을 삼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231년부터 1259년까지 몽고침입에 의한 30년 전쟁기간 중 강화도에 천도해 있는 동안 초기에는 방어용으로 다음에는 식량조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식량생산수단으로 간척사업이 시행되었다. 이것이 처음으로 해면을 간척하여 농지로 이용하였다는 역사적인 의의를 갖는다. 당시의 간척사업 역시 현재 우리가 협소한 국토, 부족한 농경지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시행하는 대단위간척사업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라고 농공기술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03. 고려, 국가차원에서 간척사업

문헌과 자료에 의하면 강화도는 본래 김포반도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오랜 침식(浸蝕)으로 평탄화 과정을 거친 후 침강(沈降)운동으로 육지와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강화도에서 간척사업이 최초로 시행된 것은 외적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한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지만 한강과 예성강, 임진강에서 흘러나오는 토사의 퇴적과 조수간만의 차가 커 간척여건이 좋았기 때문이란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강화도가 섬이지만 어업보다는 농업이 발달하는 지역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만큼 많은 바다가 뭍으로, 특히 논으로 변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간척지로 조성된 토지의 대부분을 농경지로 사용하고 있어 논과 밭의 비율이 3대1을 넘는다. 그러므로 도서지역인 강화도 안에서 생산되는 쌀만으로 주민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다. 쌀 이외에도 무, 배추, 등 원예작물과 특용작물이 많이 재배되고 있다. 특히 인삼과 화문석이 강화도의 특산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후 공민왕 때에도 하안이나 크고 작은 섬에 방조제를 쌓아 경지를 확대한 예가 있다. 이처럼 고려시대부터 국가차원의 간척사업이 추진되었음을 각종 문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간척에 관한 자료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강화도는 간척사업이 가장 활발하게 추진된 지역이었다. 특히 병자호란 때인 인조 14년 서기 1636년의 삼간포언을 비롯하여 1660년 대청언, 1696년 장지언, 1706년 선두언, 1715년 선두중언, 1777년 사곡남부언 등이 당시의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제방이었다.


04. 목민심서에 제방축조 기술 기록

특히 조선조 정종 때의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목민심서에서는 간척사업을 위한 제방 및 배수갑문 축조방법에 대한 기술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간척을 위한 방수제 축조방법으로 기중기를 사용하여 큰돌을 운반하는 방법과 한조대(?潮臺)를 만들어 조두(潮頭)를 막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정약용이 제시한 이 방법이 간척사업에 활용된 대표적인 예로서는 전남 신안군 안좌면 산두리의 간척제방을 꼽고 있다. 간척제방 비문에 의하면 방조제를 축조하여 농경지를 조성한 것을 찬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의 건립연대가 고종 2년 1865년이었으므로 실제 축조시기는 이 보다 앞설 것으로 전문가들은 해석하고 있다.

이 곳 방조제의 외사석은 그 당시 호박돌보다 약간 큰 잡석을 외축에 쌓은 것으로써 현재는 지면에서 약 0.6미터 가량 형태가 남아있다고 한다. 또한 정조실록 권 50을 보면 “산 가까이는 제(堤)가 있어 저수하고 들 가까이에는 보(洑)를 두어 인수하고 바다 가까이에는 언(堰)을 두어 방수하니 제(堤)보(洑) 언(堰) 세 가지는 수공을 일으키고 한재(旱災)에 대비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지금의 저수지, 보, 방수제 또는 방조제에 대한 기술적 입지개념이 확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역사적 사료와 유적, 문헌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선조들은 우리나라가 간척사업의 여건이 매우 좋았음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서해안 강화도와 김포해안 등 경기만을 중심으로 간척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05. 일제, 식량수탈을 위해 간척 벌여

이후 한반도에서의 간척사업은 일제시대에도 계속 이어진다. 물론 일제가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군량미 등 식량확보를 위한 목적에서 이뤄진 것이다. 일제의 식량수탈정책은 치밀하면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추진되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한 후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이듬해에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했다. 이는 일본의 식량확보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토지개량사업과 수리관개시설 개선, 간석지 및 미간지의 이용을 증진하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이다.

1910년부터 1945년 광복이전까지 일본은 식민지 수립목적인 산미증산정책의 일환으로 수리시설확충과 농지확대를 꾀하여 1917년에 조선 공유수면매립령을 공포하고 간척사업을 추진하였다. 1920년에 실시된 미곡증산계획은 15년간 42만7천5백ha의 농지를 개발하여 325만석의 식량을 증수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경지의 확장개량을 위한 기본조사를 실시하고 사업을 전담할 기관을 설치했다. 이와 더불어 경종법 개선을 추진하는 등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었으며 3만3천50ha의 간척지를 조성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일제는 1939년의 대한발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전시하에서 단기간에 증산효과를 얻도록 1940년부터 6년간 16만3천ha의 농지를 개발하는 미곡증산계획을 추가로 시행했다. 전시하에서 농업생산력이 감퇴하고 빈번한 한발에 농업이 취약하므로 관개배수, 개간, 간척 등 농지확대와 대규모 토지개량사업의 시행을 통해 12년간 57만7천7백ha를 개발하는 계획을 또다시 추진하는 등 한반도에서의 식량강탈정책을 강화해 나갔다. 1908년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일제는 간척 개간 등으로 302개 지구에서 5만3천596ha의 농지를 조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광복이후부터는 일제가 시행하던 간척공사를 조선수리조합연합회에서 인수하여 마무리사업을 실시하는 방향으로 주로 이뤄졌다. 광복당시 토지개량사업중 미완공 상태는 대소규모지구 및 간척공사지구를 모두 포함하여 약 12만ha였다. 1950년대에는 6.25 전쟁으로 일시 침체되었으나 1952년의 농지개혁사업 특별회계와 정부와 UNKRA간의 식량증산 및 수리시설복구를 위한 자금지원과 1953년의 제1차 농업증산 5개년 계획을 시발로 크게 활성화되기도 했다. 1951년도 정부를 대행해서 조선수리조합연합회가 직영으로 착수한 강화간척사업이 광복이후 최초의 신규사업이었다. 1950년부터 1960년까지 23개 지구에서 간척사업이 추진되었으며 미국 장비와 기술의 도입으로 간척사업의 기술도 한 단계 발전한 시기로 평가받고 있다.


06. 60년대부터 간척기술 크게 발전

1960년대는 50년대의 안정위주의 경제정책에서 확장우선 정책으로 변환되는 시기였다. 특히 1961년 군사혁명 후 농지의 외형적 확대를 위한 개간, 소규모 간척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으며 목포영산강 종합개발사업 등의 간척사업도 이 당시에 착수된 것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처음 실시된 1960년대 초반에는 농업생산기반을 확충하고 농경지 면적을 확장하기 위해 간척사업을 활발히 시행하였다. 특히, 1962년 1월에는 공유수면매립법을 제정?공포하고 공유수면에 관한 사항을 건설부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되, 농업 및 수산업을 목적으로 한 매립에 관한 사항은 농림부에서 처리토록 규정하였다.

UN특별기금에 의한 개간간척적지조사사업 시행으로 외국의 조사기법과 설계 시공기법이 도입되는 등 간척사업의 기술적 발전이 크게 이뤄지기 시작했다. 또한 신규농지조성 확장을 위한 대규모간척사업 계획이 차관 및 원조에 의해 시행되었다. 1962년 이후 UNTID의 간척적지조사사업, 네덜란드 NEDECO의 목포 영산강지구 조사사업, ECAFE의 기술자문으로 동진강 부창 서산B지구 등에 대한 간척예정지조사도 실시되었다. 1963년에는 방조제관리법을 제정하여 농지보전을 목적으로 해안방조제를 국가가 관리하도록 하였다.


07. 70년대 녹색혁명 차원에서 농지조성

1966년에는 공유수면매립법을 개정하여 농업 및 수산업을 목적으로 하는 매립면허권도 건설부로 일원화하였고, 1972년에는 공유수면매립법을 다시 개정하여 농경지 조성을 목적으로 하는 공유수면매립공사에 있어 외곽공사를 완료한 때에는 농림부장관에게 이관, 내부개답은 농림부장관이 시행토록 하였다. 1970년대 들어와 정부는 녹색혁명에 의한 식량자급 정책에 따라 외국의 차관자금을 도입하여 본격적으로 농업종합개발 방식으로 대규모 간척사업을 시행하였던 시기이다.

특히 주곡자급을 위하여 농업용수의 개발과 대단위 농업종합개발사업, 경지정리와 배수개선, 개간?간척에 의한 농지확대 등 농업기반개발에 대한 투자가 대폭 증대되었다. 대단위농업종합개발사업을 위해 IBRD측에 1965년 10월 5개 지구의 예비차관 신청서를 제출하여 1967년까지 IBRD측의 검토를 거치고 1차적으로 금강 평택지구 3만ha의 사업타당성 보고서를 FAO/IBRD조사단이 작성하여 1968년 4월에 제출하였다. 1969년 1월 IBRD차관위원회에서 이 사업이 채택됨으로써 대단위농업종합개발사업이 진행되었다. 영산강 I지구 경주, 미호천, 영산강 II지구, 논산지구도 IBRD차관으로 대단위농업종합개발사업이 추진되었던 것도 이 시기이다.

1974년 5월에 아산 · 남양방조제가 준공된 것을 비롯해 금강지구는 1976년, 평택지구 및 경주지구는 1977년, 계화도 및 영산강 I 단계는 1979년도에 각각 준공되는 등 70년대는 간척사업을 비롯한 대규모 농업종합개발사업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간척사업은 곧 국가경제발전과 직결될 뿐만 아니라 극심한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정책수단이었던 것이다. 간척사업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1974년 5월 22일 아산?남양방조제 준공식 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치사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이제 우리는 이 두 개의 방조제를 완공함으로써 이곳 아산만 일대를 비롯한 이만여 정보의 광활한 농경지에 풍부한 농업용수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아직도 개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구릉과 야산을 옥토로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900만평에 달하는 광대한 간척지를 새로운 농경지로 얻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 이 지방 농민들은 장마가 지든, 가뭄이 들든 한해와 수해 걱정 없이 언제나 마음놓고 영농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곳 주민들의 소득증대를 촉진하고 나아가 우리나라 식량증산에도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08. 農工竝進정책 뒷받침

박정희 대통령은 아산 남양방조제 준공에 따른 사업효과 중 식량증산에 가장 큰 의의를 두었던 것이다. 1974년의 정부의 최우선 농정목표가 『쌀3,000만석 돌파』였으며 국가적 숙원인 주곡만이라도 76년까지 완전자급을 앞당겨 실현하기 위한 증산작전을 전개하던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간척사업을 통한 식량자급기반확충이 시급한 국가적 당면과제임을 알 수 있다.

박 전대통령은 이어서 “지금 준공을 본 이 방조제는 비단 농업분야 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우리나라 공업진흥에도 획기적인 기여를 함으로써 우리의 農工竝進정책을 굳게 뒷받침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아산만 일대는 용수가 풍부하게 되었고 더욱이 양항(良港)을 건설할 수 있는 해안을 끼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다목적 기간산업기지로 개발하는 데 이 방조제는 값진 초석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간척사업의 1차적 목표는 우량농지를 조성하여 식량자급기반을 다져나가는 것이었으며 2차적 목표는 방조제와 담수호, 그리고 국가산업단지 조성 등으로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것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70년대 이후 추진된 대규모농업종합개발사업과 간척 사업으로 조성된 토지는 농지로 활용되거나 국가산업단지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방조제는 지역산업과 관광, 문화발전의 사회적 인프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담수호는 농업, 공업, 생활용수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농업과 공업의 병행발전이라는 국가정책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1975년부터 미완공 간척사업의 마무리에 전력한 결과 46개 지구 1,550ha의 간척농지를 조성하였다.

또한 간척자원조사로 매립면적 60만5,000ha, 간척농지 40만5,000ha, 담수호 90억㎥의 개발가능성을 확인하였는 데 이는 80년대 이후의 간척개발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사업시행 제도면에 있어서도 또다시 농업 및 수산양식을 목적으로 하는 공유수면매립 권한은 1978년에 "행정권한의 위임 및 위탁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여 농림부장관에게 위탁되었다. 또한, 농지관리기금 운용으로 서남해안간척개발사업을 적극 추진하게 되었다.


09. 91년 최대의 간척사업 새만금 착공

1980년대는 70년대에 착공한 대단위농업종합개발사업을 마무리하는 시기로 창녕, 임진, 낙동강, 남강, 논산, 금강 1단계, 미호천 1단계 등 7개 지구가 준공되었다. 또한 1981년에 대호, 85년에 영산강 III-1지구, 89년에 미호천 II지구, 금강 II지구 및 영산강 III-2지구가 착공되기도 했다.

대체농지개발사업 중 서남해안간척사업 14개 지구 4,342ha와 미완공간척사업은 10개 지구 2,253ha의 개발도 80년대에 추진되었다. 1991년도에는 간척농지개발 개선책을 마련하여 1992년부터 지역여건을 감안한 토지 이용계획을 수립하여 간척지를 경작지역, 영농관리지역, 공공시설지역, 산업관광지역, 수자원 보전지역 등으로 구분하여 종합개발 방식으로 간척사업을 시행하게 되었다. 90년대 들어서는 단군이래 최대의 간척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새만금종합개발사업이 시작된다.

1991년 11월 28일 전북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에서 당시 노태우 대통령을 비롯한 총무처장관, 동자부장관, 농수산부장관과 전북출신 국회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가졌다.

노 전대통령은 균형발전의 표상이라는 제목의 치사를 통해 “이 세기와 새로운 세기를 잇는 이 역사(역사)는 국토와 산업의 균형 있는 발전을 이룩하려는 시대정신의 표상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하늘의 힘이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넓은 국토를 만들려 합니다. 그 새로운 국토 위에 산업화와 농수산업의 발전, 도시와 농어촌이 조화를 이루는 살기 좋은 고장을 건설할 것입니다. 새로 조성될 새만금 평원의 임해공단은 군장산업기지와 맞물려 이 지역을 21세기 한국산업을 이끄는 중심지역으로 만들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동안 시행한 간척사업으로 91천ha의 국토확장과 대규모 우량농지 조성으로 연간 576천 톤의 쌀 증산을 통한 식량안보 강화에 기여한 부분이 가장 큰 효과로 꼽히고 있다.


10. 국토의 균형발전에 기여

또한 대규모 담수호 조성으로 3,046백만㎥/년의 홍수조절을 통해 상습적인 침수문제를 해결하는 등 대규모 재해방지기능을 통한 인명과 재산피해 방지는 물론이고 국토보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간접적으로는 방조제 축조에 의한 육운 개선과 수자원 확보로 평택, 아산, 당진, 서산, 영암, 해남지역 등 산업단지와 관광자원 조성 및 내수면 개발로 농어촌지역 산업 및 경제활성화를 도모함으로서 국토의 균형발전과 농어업인의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동안 시행한 간척사업으로 91천ha의 국토확장과 대규모 우량농지 조성으로 연간 576천 톤의 쌀 증산을 통한 식량안보 강화에 기여한 부분이 가장 큰 효과로 꼽히고 있다.
농어촌정보 포털 서비스, 농어촌알리미
별점평가하기
정보에 대한 만족도

평가하기


★ 고객님의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의견함에 의견을 등록해주시면 <공지사항>을 통해 답변드립니다. 답변 확인하러 가기(공지사항)